* 공감은 한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공감은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감정적 교류다. 공감은 둘 다 자유로워지고 홀가분해지는 황금분할 지점을 찾는 과정이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아야 제대로 된 공감이다.
* 잘 모를 때는 아는 척 끄덕끄덕하지 말고 더 물어야 한다. 이해되지 않는 걸 수용하고 공감하려 애쓰는 건 공감에 대한 강박이지 공감이 아니다. 에너지 소모만 엄청나다. 그렇게 계속 버티기는 어렵다.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무슨 수로 공감하나.
* 공감한다는 것은 네가 느끼는 것을 부정하거나 있을 수 없는 일, 비합리적인 일이라고 함부로 규정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는 것이다. 관심을 갖고 그의 속마음을 알 때까지 끝까지 집중해서 물어봐 주고 끝까지 이해하려는 태도 그 자체다.
* 누군가의 속마음에 깊이 주목하고 귀 기울이기 시작하면 반드시 자기 내면의 여러 마음들이 떠오른다. 타인에게 귀 기울이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고통이자 축복이다.
* 누구든 타인을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제가 자극돼 떠오르고 뒤섞이면 혼란에 빠진다. 그때의 혼란은 자기 치유와 내면의 성숙을 위한 통과 의례 같은 반가운 훈련이다. 어떤 종류이든 혼란은 힘들다. 에너지 소모가 극심해서다. 그럼에도 나에 대한 혼란은 반가운 손님이다. 꽃 본 듯 반겨야 한다. 그 혼란에 주목하고 집중해야 한다.
* 안전하다는 느낌만 있으면 상처받은 사람은 어떤 얘기보다도 그 얘기를 하고 싶어 한다. 자기 얘기를 잘 들어줄 것 같은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낯선 상황이나 낯선 사람이라도 어떤 식으로든 그 말을 꺼내는 경우가 많다. 이해받고 위로받고 싶어서다. 공감을 받고 털어내야만 머릿속에서 자기 상처가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아픈 기억의 습격' 속의 삶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껴서다.
* 사람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건 원래의 상처 그 자체보다 그 상처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통해 받는 2차 트라우마다. 1차 트라우마가 총을 맞은 것이라면 2차 트라우마는 확인 사살을 당하는 것이다.
* 용서받기 어려울 만큼 심한 폭력을 휘둘렀던 부모라도 자식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면 자식은 마치 자존심이 없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마음을 돌린다.
* 부모인 내가 자식을 사랑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 보모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가 느껴야 사랑이다. 사과도 마찬가지다. "난 사과했어"가 아니라 엄마인 내가 얼마나 미안해하고 가슴 아파하는지 아이가 느끼고 아이 마음에 스밀 때까지 해야 진짜 사과다.
* 자식들은 부모에게 자기 마음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모가 눈감고 코끼리 만지듯 헤매고 있을 뿐이다. 존재의 핵심이 느낌이라고 했다. 거기가 문고리다. 느낌에 공감을 퍼부으면 그 힘으로 문고리가 돌아가고 속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다. 치유가 시작된다.
*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은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렇다.
*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